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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
이름 : 박병대비뇨기과
미국 태생의 이사도라 던컨(1878~1927)은 모던 댄스의 개척자로 불리운다. 18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5살 때에는 뉴욕에서 델리의 무대에 출연했다. 그후 1~2년간 자신만의 무용을 했으며 관객을 사로잡아 상당한 재산을 모으며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 이름을 떨쳤다.

그녀는 음악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울러 발레도 습득하였다. 가난한 무명의 젊은 무용가로 유럽에 건너갔던 이사도라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관객의 개념까지 변화시켰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을 사랑한 반항적 기질이 있었으며, 그래서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7년 18세의 이사도라는 델리단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델리의 주선으로 발레지도를 받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다시 본판티의 지도를 받았다. 비록 이사도라는 발레가 비표현적이라하여 반대하였지만, 기본적인 발레지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대중의 견해와는 달리 이사도라는 무대 위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착상으로 춤추지 않았다. 옷감 선택에서부터 의상 제작, 배경활동 등 모두를 세밀히 준비하였다. 이 점이 그녀의 재능이며, 또한 무용이 가식없이 보이도록 노력하는 의도였다. 자신의 신무용에 대해 명료하고도 능숙한 포용력을 지닌 이사도라는 공상적으로 작품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녀는 1899년 시카고 데뷔 공연 때는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그때까지 기교 위주의 발레밖에 보지 못한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랐으며 그녀의 무대의상의 양상까지 변화시켜 이사도라 이후 발레를 포함한 모든 무용수들은 유행에 얽매인 의상보다 적절한 무용의상을 입고자 했다.

그녀는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사도라는 그 해에 파리에서 새로운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그녀의 공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은 곳이 독일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혁명은 발레에 대한 반항이요, 나아가 그 당시 남자와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반기였다.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남자와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결의가 여성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때, 이사도라는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의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인 것이며,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 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는 기법이나 표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을 주장하였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일을 개척하였다. 20세기를 맞을 때까지 독일은! 무용면에서는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다. 그러한 독일의 19세기이후 프리드리히 얀(1778~1852)이라든가 구츠무츠(1759~1839)가 제창한 육체문화운동이 국민 전반에 보급되었다. 물론 이 운동에 영향을 주고 목표를 제시한 사람은 이사도라이다. 그 후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수많은 일반인이 이사도라의 신무용을 향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을 신무용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무용적인 보건운동의 영역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녀의 50회 생일이 다가올 즈음 새로이 알게 된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러 나가기로 약속한 이사도라는 목에 붉은 빛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언제나처럼 한쪽 같을 끌면서 차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이사도라의 목이 젖혀지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사도라는 작품을 미완성한 채 자신의 새로운 춤이 어떻게 규명될 지 모른 채 죽은 것이다. 또한 던컨 무용학교를 전세계에 세우고자 했던 그녀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다. 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무용이 육체의 동작을 매개로 한 인간 정신의 신성한 표현이라고 한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미국에서 발생한 이 예술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독창적인 움직임의 양식을 흉내내거나 발전시킨 루스, 세인트,, 데니스, 도리스, 헌프리, 마사 그라함 등의 거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클래식 발레의 규범과 인공적인 양식에 반대해서 무용을 인간의 강렬한 표현형태로 발전시킨데 있는 것이다.

던컨은 그녀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이라는 수단으로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무용을 추구한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고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용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와 대중, 특히 여성에게 자유와 함께 영감을 불어넣어준 이사도라의 자서전도 있다.



현대무용이란 발레와같이 똑같이 움직이고 표현해 내며 여성에게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순종적인 삶을 기대하던 춤이 아닌 , 자신의 온몸으로 참다운 여성을 살아낸 사람 자유로운 정신으로 멋지게 춤을 추었던 이사도라 던컨이다.


등록일 : 200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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