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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 지식을 찾아서] 2. 각화사 고우 스님
이름 : 박병대비뇨기과
[善 지식을 찾아서] 2. 각화사 고우 스님

"正.邪만 잘 가려도 세상 이렇진 않아"


지난 5일 오전 1시 경북 봉화군 각화사는 흰눈으로 덮였다. 대웅전에서 산자락을 타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담한 암자인 서암(西庵)에도 발목이 빠질 만큼의 눈이 내렸다. 첩첩산중, 저 멀리 산마루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환하게 걸려 있다. 칠흑의 산사(山寺)와 순백의 서설(瑞雪)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백(白)도 없고, 흑(黑)도 없다. 그냥 장관이다.

*** 수행이란 '착각' 없애는 것

각화사 태백선원장 고우(古愚.68) 스님은 이곳 서암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암자는 단출한 신혼 살림집 같다. 주방에는 전기밥솥.세탁기.냉장고.식탁 등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스님이 손수 접시를 닦고 과일을 내놓았다. "인생의 반 이상을 토굴(암자)에서 지냈어요. 아침.저녁은 여기서 끓여 먹고, 점심은 절에 내려가서 먹죠. 손가락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니(가전제품 작동을 의미), 불편할 게 없어요."

스님은 편안했다. 서릿발 같은 선승(禪僧)의 준엄함을 찾기 어려웠다. 깊숙한 미소와 나직한 목소리, 마음씨 푸근한 이웃 할아버지를 만난 듯했다. 낯선 이의 긴장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지난해 잇따라 열반한 큰스님들의 뒤를 이을 대표적 선지식으로 꼽히는 그의 평판에 비하면 다소 '싱겁다'는 느낌마저 든다. 다만 짙고 길게 자란 눈썹이 그의 범상찮은 공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젊었을 땐 과격하다, 공격적이다, 비판적이다라는 지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폐병을 얻었다는 말마저 들었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 모든 이가 딸처럼 보여요. 지금은 어떤 일이든 가급적 저를 맞춰갑니다."

스님은 실제로 스물다섯살에 폐병을 앓아, 한쪽 폐를 잃기도 했다. 맞춰간다? 불교에선 이를 하심(下心)이라고 부른다. 자기를 낮추고 중생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세속말로 치면 겸양? 그러나 그에게선 '고의적' 하심이 없었다.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질문에 응대했다.

-평소 깨우친 게 없다고 하셨죠.

"그래요, 장좌불와(長坐不臥.누워 자지 않고 앉아서 참선)나 용맹정진(하루 18시간 이상 수행) 같은 치열한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정(正.올바름)과 사(邪.그름)는 가릴 수 있어요. 그것을 가리는 사람만 많아도 우리나라가 이렇진 않을 겁니다."

-정은 뭐고, 사는 뭔가요.

"정이란 있다(有), 없다(無)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고, 사는 구분하는 겁니다. 유무에 집착하면 패거리가 됩니다. 내 편, 네 편을 나누게 되지요. 저는 그런 사람을 테러에 전쟁으로 응하는 '부시형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재미있습니다.

"수행도 그렇습니다. 뭘 닦는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겁니다. 세상에 닦을 게 없는데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본래 우리는 완성된 존재입니다. 그게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러면 수행은 뭐죠.

"착각을 없애는 것입니다. 뭐가 있어서 닦는 게 아니라 유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다 불성(佛性)입니다. '깨칠 게 있다''얻을 게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성이 따로 있다고 하는 건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행위입니다. 맨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양반이 상놈이 되려는 꼴이죠."

*** 가치관 바꾸면 행복해져

-유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유무에 집착하면 이기심이 커집니다. 예컨대 내가 있다고 칩시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불이익을 주면 당장 증오심이 생길 겁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오히려 연민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차이죠."

-내가 있으니 의욕이 있고, 발전도 있지 않을까요.

"그게 자본주의 원리죠. 욕망의 극대화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사는 게 어떤가요. 갈수록 힘들다고 아우성치지 않습니까. 가정이나 직장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죠. 고통을 잊겠다고 폭탄주를 들이켜잖아요."

-하긴 그렇군요.

"직장을 포기하라는 게 아닙니다. 가치관을 바꾸면 오히려 세상이 더 즐겁고,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니, 상대를 위하고, 그게 쌓이면 행복과 성공이 찾아오고, 리더도 됩니다. 이런 걸 무한향상이라고 합니다. 무한경쟁은 답이 될 수 없죠."

스님은 여기에서 명쾌한 사례를 하나 들었다. 사찰 인근 영주시에서 식당업을 하는 신도 한명이 있는데, 스님을 찾아와 장사가 안 된다고 울상을 지었다고 한다. 그때 스님은 "손님을 돈으로 보지 말고 은인으로 보라"고 권고했다. 한달 후 찾아온 식당 주인은 "장사가 너무 잘된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넓고 멀게 보면 모두에게 득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비결이 있군요.

"자기만 잘 살겠다고 하면 불행만 찾아옵니다. 지금 교도소를 보세요. 정치에 성공했다는 사람들로 꽉 차지 않았습니까. 요즘 부모들도 각성해야 합니다. 자녀의 행복 대신 성공에만 집착합니다. 슬픈 일이죠. 내 말이 어렵습니까. 아니죠, 쉽죠. 너와 내가 따로 없다, 이것만 기억해도 세상은 평화로울 겁니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으세요.

"매일 신문을 봅니다.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민주화된 요즘이 오히려 더 걱정스럽습니다. 제 주관적 판단이긴 하지만 예전 독재시대에도 '지역감정을 타파하자'고 했습니다. 통합의 목소리가 있었죠. 그런데 최근엔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어요. 자기와 다르면 '물러가라''꺼져라'고 외칩니다. 사회는 민주화됐어도 요즘 지도자에게선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애국자적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도(中道)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죠."

-중도라뇨.

"간단히 말해 양변(兩邊.극단)을 여의는 게 중도입니다. 불교는 이 한마디에 다 있습니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무에 얽매이지 않는 게 중도입니다. 세상에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건 없다는 점을 일컫습니다. 다른 말로 '공(空)''청정(淸淨)''평등(平等)'이라고 하죠. 이 양변을 여의면 지혜와 광명이 생기고, 일상에서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교에선 이를 '구름이 걷히니 태양이 절로 나온다(雲開日出)'라고 표현합니다."

*** 세상만사 中道로 풀어야

-문제는 실천이겠죠.

"체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매우 어렵죠. 그래서 일단 이해라도 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매일매일이 좋은 날입니다. 정치로 치면 편가르기식의 물리적 개혁이 아닌, 다 함께 잘 사는 평화적인 연민의 개혁을 뜻합니다."

-그렇게 좋은 가르침이 있는데 세상은 변한 게 없습니다.

"불교가 사회에 영향을 못 미치는 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일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몸은 승단에 있어도 마음은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스님이 많은 것이죠. 스님들부터 일대 가치관 전환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를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리가 밥값을 하는 겁니다. "

인터뷰 당일 태백선원에선 지난 15개월 간 매일 15시간씩 가행정진(加行精進)한 승려 20여명의 해제(解制.안거를 마침)가 있었다. 일반 하안거.동안거의 다섯배가 되는 기간 을 수행했던 스님들이 보따리를 싸고 각기 정처를 향해 흩어졌다.

"목숨을 걸고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한국 불교의 기술자 양성 차원으로 이해해 주세요. 이들 스님들이 각계 각층으로 나가서 훌륭한 '제품'을 만들 겁니다."

고우 스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을 잡고 한마디를 당부했다. "이것 하나만은 절대 간직하세요. 만사를 중도로 생각하고, 중도로 풀도록 하세요." 각화사 종루 앞에 거센 눈보라가 일었다. 힘들었지만 좋은 날이었다.

봉화=박정호 기자


*** 고우 스님은 누구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조계종 내부에서 두루 신망을 받는 선승으로, 1961년 폐병이 들어 김천 수도암에 요양하러 갔다가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9세 때 부산 월래의 묘관음사 선방에서 향곡 스님으로부터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닌 이것이 뭐꼬?"라는 화두를 받은 이후 줄곧 여러 토굴.선원을 돌아다니며 참선에 전념했다.

스님은 현재 조계종 수행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경북 문경 봉암사 특별선원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지난해 입적한 서암 스님의 '생활을 통한 불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스로 농사 짓고, 밥하고, 바느질하면서 공부하라는 서암 스님의 가풍이 요즘 사라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알기 어려운 불교를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는 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은 요즘 예전과 달리 대외 강연도 활발히 하는 편이다. "나이가 든 까닭인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이제는 조금씩 얘기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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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6 17:52 입력 / 2004.02.07 11:06 수정


등록일 : 200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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